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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강수)공 휘 훈(文度公 諱 薰) 행록
1. 훈(薰: 1484~1540),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 시호는 문도(文度) 눌재공 증영(訥齋公 增榮)의 아들. 1504년(연산 10년) 사마사(司馬試)에 합격, 의영고 주부(義盈庫 主簿).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을 직접 보필할 사람이 외직은 부당하다하여 부임을 안고 지평의 벼슬을 받음, 1519년(중종14)현량과(賢良科)의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 동부승지(同副承旨)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때에는 신진사류(新進士類)로 지목되어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의주(義州)에 유배(流配)되고, 13년 후인 1532년 다시 안악(安岳)에 이배되었다가, 1536년에 풀려 나 모부인(母夫人)이 계신 청주 강외면에 낙향, 향년 57세 졸(卒), 이조판서 증직, 신항서원과 덕산사에 배향되고 묘소는 청주 옥산면 옥산리읻. 향사는 음력 10월 10일이다. 유형문화재-눌재,강수유고판목 이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되어있다 .

2. 동부승지 문도공 강수묘갈명(同副承旨 文度公江?墓碣銘)
박씨가 저명(著名)한 성씨가 된 것은 신라시조왕의 귀(貴)한 혈통(血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선조에는 명인과 문사(聞士)가 많아 서로 이어 훌륭한 벼슬을 하였으므로 그 이름이 국사(國史)나 가첩(家牒) 수록되어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멀리 내려와 그 말손(末孫)에 휘 절문(切問)이 있었으니 찬성(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공에게는 고조(高祖)이다. 찬성이 정난공신(靖難功臣)이자 밀산군(密山君)에 봉(封)해진 휘 중손을 낳았고 밀산군(密山君)은 예조참의(禮曹參議) 휘 미(楣)를 낳았으며 참의공(參議公)의 아들인 휘 증영(增榮)으로 사람됨이 준수(俊秀)하여 넓게 통달하여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통(能通)하여 한 때 큰 이름을 떨쳤다. 특히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문과사시(文科事試)에 뽑혀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문한(文翰)에 종사하다가 29세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졸(卒)하니 성종도 매우 애석(哀惜)하였다. 배위는 밀양변씨 卞卿貢 딸이다.
교리공의 사자(嗣子)는 휘가 훈(薰)이고 자는 성지(聲之)이며 호는 강수(江?)이다. 어릴적 부터 묵중하고 말이 적고 아아들과 함께 장난을 치지 않았고 장난감도 즐기지 않아 사람들이 함께 장난을 치지 않았고 장난감을 즐기지 않아 사람들이 기이(奇異)하게 여기었다. 나이가 들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를 민망스럽게 소자(小子)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였으니 타 이름을 받을 곳이 없다. 내 힘으로 배우지 않는다면 입신하기야 선인(先人)의 덕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다.
하고는 발분(發憤)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周子(周濂溪) 정자(程子 程明道, 程伊川의 兄弟) 장자(張子: 張橫渠) 주자(朱子: 朱熹) 등의 성리서를 장막을 내리고 밤낮으로 여구하여 의리를 몸소 실천하여 공효(功效)를 이룬 뒤에야 그만 두었다. 여러 사실과 학설을 두루 통달하여 그 근원(根源)을 연구하고 흐름을 섭렵(涉獵)하여 구명(究明)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오르지 강학(講學)에 힘쓰고 과거(科擧)에 힘쓰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의 의사(意思)에 따라 과거에 임(臨)하였으나 본뜻은 아니었다. 홍치(弘治)17년(1504)에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니 이때에 교리 이탄수(李灘?)는 말하기를 이번 과거(科擧)에 수재가 많았으나 학문에 힘쓰고 닦은 행실을 스스로 지킨 자는 나의 벗 박군성지(朴君聲之)가 으뜸 이였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소문이 더욱 펴져 대신들의 잇단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에 발탁되고 얼마 후에 보은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을 직접 보필해야 할 사람에게 외직은 부당하다 하여 이조(吏曹)의 실정을 책(責)하고 부임(赴任)하지 못하고 감찰(監察)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등으로 전전승진(轉轉昇進)하였다. 이때에 선생은 현량과(賢良科)에 뽑히여 사림(士林)도 기뻐하고 장령검상(掌令檢詳) 사간(司諫)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니 이해가 곧 정덕(正德)14년 기묘(己卯)였다. 선생이 간관(諫官)으로 있을 적에는 그 말이 바른고로 탄핵(彈劾)을 받는 자(者)가 피할 길이 없었고 간신(奸臣)들이 활개치지 못하여 퇴폐한 풍습이 말끔히 가시었다.
정원직(政院職)에 있을 때는 임금을 보필하여 덕교(德敎)를 선양(宣揚)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서 매우 중하게 여겨 나라의 그릇이라고 찬양(讚揚)하였다. 일방간사(一方奸邪)한 무리들은 눈흘겨 원수 보듯하여 붕당(朋黨)을 이루어 공모(共謀)하여 밤을 틈타 대궐로 들어가 임금의 귀를 속여 일거(一擧)에 현량(賢良)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였다. 드디어 선생이 성주로 귀양가매 오히려 가까운 곳이라 하였는데 의주(義州)로 가게 되자 모두 선생을 위태롭게 여기였다. 그러나 선생은 두렵게 여기지 않고 마음은 평화롭고 기운은 안정되어 으젓한 표정이었으니 그 죽고 사는 것이 동요되지 않음이 이러하였다.
적소(謫所)에서 고통스러운 몸이 만리길의 결박된 죄인(罪人)이 되어 가묘(家廟)의 제사(祭祀)를 친(親)히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고조고제(高祖考祭), 생탄일(生誕日), 사시제(四時祭), 중월제(仲月祭)를 당하면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지방신위(紙?神位)를 모시고 제수(祭需)를 융숭히 하여 재가시(在家時) 못지 않게 하였다.
13년의 세월이 흐르자 모함하였던 간신(奸臣)들이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어 이때부터 공정한 의론(議論)이 점점 시행되어 선생을 안악(安岳)으로 이배(移配)하였다가 3년 후에야 임금의 특명(特命)에 의하여 고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모부인(母夫人)은 오히려 아무 병없이 선생을 모셨는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한채 말과 얼굴을 유순케 하여 모부인을 위안(慰安)하였다. 봉양에는 의복을 부드럽게 하고 음식은 입에 달게 하여 원하는 대로 드시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병환이 나면 의원을 찾아 손수 불을 집혀 알을 달여 맛을 본 후에 드렸다. 모부인의 병세가 짙어지자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빌어 죽움을 자신이 대신 할 것을 빌었고 드디어 상을 당하자 뛰면서 하늘을 부르짖으며 울었고 눈물이 피가 되도록 거적자리에 엎드려 애통하였고 밤에는 수질(首?)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아 기운이다 하고 몸이 쇠약해져 끝내는 병이 생겨 가정(嘉靖) 19년(1540) 3월 12일 복중(服中)에 서거(逝去)하니, 관과 민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향년 57세로서 청주의 천내산선묘(川內山先墓)곁에 부장(?葬)하였다.
선생은 천성이 순수(純粹)하여 행실이 발라 동(動)하면 법도(法度)에 맞았고 마음이 관인(寬仁)하여 사람을 대함에 어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새벽에 별을 보고 일어나면 머리와 갓을 정돈(整頓)하고 똑바로 꿇어 앉아 어깨와 등이 곧아 자세(姿勢)가 엄격(嚴格)하기가 마치 그림속의 상(像)과 같았다. 가정에서는 효제(孝悌)를 근본 삼아 노유(老幼)가 같이 즐겼고 은혜로 서로 사랑하되 예법으로 다스렸으므로 상하(上下)가 한결같이 조리있고 문란하지 않았다. 몸가짐이 검소하여 빛나고 사치스러운 것을 배척하였다. 아침상에 포육(脯肉)이 둘만 되어도 놓지 못하게 하고 쓰는 십기물(什器物)은 모두 거칠고 초라하였으며 붉은 칠이나 금옥(金玉)으로 꾸미는 일도 없었다.
선생은 사람을 대함에 항상(恒常)화기(和氣)가 미간(眉間)에 감돌았고 말을 할 적에는 감(敢)히 극진하게 못하여 상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시비(是非)를 가려내거나 사정(邪正)을 판결 할 적에는 말 줄기가 용맹스럽고 예리하여 마치 보검(寶劒)이 가을빛을 가르는 듯하였다. 항상 은혜(恒常恩惠)를 베풀어 사람을 구제(救濟)하였고 봉록(俸祿)은 가난한 친척(親戚)이나 친지(親知)를 위하여 썼으며 가취(嫁娶)와 상장(喪葬)에도 정을 후(厚)하게 하여 집에는 언제나 남아드는 저축(貯蓄)이 없었다. 교우(交友)는 당시(當時)의 석유(碩儒)나 명현(名賢)으로 특히 대사헌 조정암(趙靜庵)과는 서로 알음이 격별(格別)하여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다. 정암(靜庵) 역시 선생을 경중(敬重)하여 나라의 큰일은 반드시 상의하여 처결(處決)하였다. 선생의 풍채(風采)와 용모(容貌)는 어개(魚介)의 종(宗)인 거북과 용과 같았다.
배위는 선생보다 앞서 졸(卒)하였고 2남 2녀인바 남(男)은 희원(熙元), 선원(善元)이고 여서(女?)는 이명언(李明彦)과 오식(吳軾)이다. 선원은 2남(男)인바 승현(承賢), 사현(嗣賢)이고 언명(彦明)의 자(子)는 순(淳)이고 식(軾)의 자는 종범(宗範)이다.
아! 철인(哲人)의 태어남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이는 하늘이 석덕(碩德)과 영재(英才)를 내고 대임(大任) 내린 것이다. 선생이 처음 조정(朝廷)에 나아가자 조야(朝野)의 기대는 자못 컸으며 하늘이 준 사명은 세상을 건지려 한 것인데 간사(奸邪)한 자들의 모함을 받아 일생을 마치었으니 시기 탓일까 운명 탓일까 슬프고 슬픈 일이다.
난초가 어찌 향기롭지 않겠는가마는 악초(惡草)가 가라워 그 향기를 빼앗고 사람이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마는 간악한 칼날이 성내어 부딪쳤네 도는 굽혀지고 몸은 죽었어도 훌륭한 이름은 더욱 빛났으니 오래 오래 전하도록 고운 돌에 명(銘)을 새기네

大谷 成運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