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 유래
밀양박씨 12중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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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군 휘 사경(上將軍 諱 思敬) 행록

『典法判書兼上將君推誠翊0功臣享年九十三.墓高陽市舟橋洞朴齊宮癸坐有石儀齊宮名推遠齋己未碑石改竪.配貞敬夫人全州李氏父善墓全州失傳故檀紀四二九七年甲辰設壇于公墓左』

 

1. 벼슬이 전법판서 겸 상장군이며, 추성익위공신이시다. 기질이 혼후인자하였으며 자손을 사랑으로 교육하고 비복을예로 다스렸으며 비록 천한 사람이라도 화애롭게대하고 근검 절도를 실천하시여 모든백성의 교훈이 민생에게 까지 미치었으며 93세의향수를 하시다. 묘소는 고양군 원당읍 주교리 두응촌 계좌이며 묘비와 석물이있고 재실은 추원재이며 입구에 박재궁이라 색인묘석이있다. 서기 1979년기미에 비석을 개수하였고 서기 1988년 무신 8월 8일에는 추원재의 건물을 거대하게 신축준공하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 주이씨이니 부는 수선이요 묘소는 전주에 있다고 전하여올 뿐 실전되어 갑진년 5월 상장군산소 왼쪽에 설단하고 제향한다. 상고하여 보니 고려 관제에는 내외명부 제도가 없어 조선 시대의 관제에 준하여 갑진년 족보때 비로소 정경부인이라 기재 되었으며 그후로정경 부인이라 하며 갑진년 설단 비문에도 그리새겨져 있다.    전주이씨

 

 

상장군 휘 사경 묘제 광경

상장군 묘역 

상장군 묘제 광경

2. 고려추성익위공신전법판서겸상장군공 묘비명(高麗推誠翊威功臣典法判書兼上將軍公 墓碑銘)

 

  무릇 사람의 집이 후손이 퍼지며 창성하고 커지는 것이 선조들에게 인덕을 오래 쌓온 덕분이 아님이 없다. 진실로 후손된 자가 공경하여 선조들의 뜻을 이어 그 도리를 다하기에 힘쓴다면 어찌 갈수록 창성할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우리 박씨는 신라 시조 왕을 시조(始祖. 鼻祖)로 하여 경명왕(景明王)에 이르러 여덟 아들이 봉(封)함을 받았는데 밀성대군 휘 언침께서 첫 자리에 계셨다. 전(傳)하며 고려조에 이르러 휘 현(鉉)께서 사헌 규정의 벼슬을 하셨으니 12중조(中祖 중시조)의 한분이시다. 이분이 휘 문유(文有)를 나으시어 전리좌랑을 지내시니 공의 할아버지가 되신다. 공의 휘는 사경(思敬)이요 전법전서 겸 상장군으로 거듭 추성익위공신을 받으셨다.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육백여년 동안에 도덕절의(道德節義)와 충효문장(忠孝文章)이 대대로 끊임이 없고 높은 벼슬이 서로 이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했다.이는 무릇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길고 뿌리가 단단하면 가지가 뻗는다하였으니 진실로 그와 같은 것이다. 상고하건대 고려사 열전(烈傳) 이인임(李仁任)편에 판서공이 고려운수가 끝나가는 때를 당하여 간신의 무리가 국권을 마음대로 하매 온 조정이 휩쓸리지 않는이가 없었으나 오직 박상충(尙忠)공과 함께 의연히 아부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붙들고 간사함을 물리쳐 태후에게 사뢰어 간악한 무리의 간악한 죄를 바르게 밝히시니 이는 백세까지도 의혹됨이 없는 일이다. 이에서 판서공의 바탕이 강정(剛正)하고 논법이 정대하시어 의영히 굽힘이 없고 옳은 일을 보면 용기가 있으시어 간악한 자들이 나라를 그르치는 죄를 막으심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잡는 실적을 거두게 하였음을 대개 추측할 수 있다.

  이 어른의 가슴속에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 정의(正義)에서 나타남이 훗날 공신에 책봉된 것은 나라 보위를 잘하신 공로를 상 주신 것임이 확실하다. 공과 같은 덕행이라면 마땅히 세상을 위하여 크게 쓰여서 높이 나타나야 하거를 그러나 벼슬이 판서 겸 상장군에 그치셨으니 이는 지위가 덕에 차지 않아 다 쓰시지 못하여 한이 되는데 더구나 고려사 가운데 별로 현저한 공로를 특별히 쓴 것이 없다. 즉 이는 고려 말에 사가(史家 史筆)가 빠뜨려서 전하지 못함 일 것이다. 후손된 자의 한이 크도다. 그러나 공의 손자 강생(剛生) 부제학 공의 유서에 대략 말씀하시기를《나는 본래 밀양의 한족(寒族)으로 법 받을 바 없으나 그러나 고조 현(鉉)은 사헌부 규정으로 삼품 벼슬을 하시고 연로(年魯)하신 후에 고향에 돌아와 87세 수를 누리셨고 증조 문유(文有)는 과거에 뽑히시어 전리좌랑이 되시어 또한 삼품(三 品)으로 치사하신 후에 농촌에 처하시어 95세까지 수를 누리시니 내가 어려서 뵈었고 조부님 사경(思敬)은 벼슬이 전법판서 겸 상장군의 지위 이르셨고 추성익위(推誠翊威)의 공신칭호를 받았으니 우리 집안이 이때부터 명성이 드높았다. 나는 나이 13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께서 나의 외로움을 애처롭게 여겨서 친히 학문을 권장하시고 비록 다 통달하지는 못했지만 무식은 면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할아버님이 가르쳐주신 덕택이었다》하였고 또 《할아버지는 기질이 온후하고 자손들을 사랑으로 교육하여 비복(婢僕 하인)을 예로써 대우해서 비록 천한 하인일지라도 거친 말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역시 93세의 상수(上壽)를 누리시고 돌아가셨는데 비록 크게 등용되지는 못했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덕으로 감화시켜서 존경을 받았으니 자손들이 본받을게 많은 어른이었다. 더구나 고조, 증조, 조부님들께서 80이 넘게 수를 누셨으니 이것은 조상님들께서 적선을 많이 한 덕일 것이며 이후로도 후손들이 반드시 세상에서 크게 쓰이리라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판서공은 지극히 인자하시고 후덕하였음을 능히 짐작할 수 가있다. 마침내 조상님들의 음덕이 결실을 맺어서 이름난 선비와 높은 벼슬들이 계속 이어지며 세상에서 알아주는 공훈 있는 어른들이 수없이 배출되었고 후손들은 구름같이 번성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난 가문이 되었으니 이 어찌 공의 크고 원만한 사랑의 마음에서 근원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후손들의 터전이 열리게 된 것이며 또 공의 영혼이 묵묵히 후손을 돕고 계신 것으로 생각된다. 시전(詩傳)에서 이르되 《그대들 조상님들을 욕되게 하지 말고 조상님의 덕을 이어받아 더욱 힘쓰라》하였으니 대개 덕을 닦는다는 것은 조상님들이 행한 좋은 잊지 않는 것도 되는 것이니 선조를 극진하게 공경하는 도리는 그 근원이 덕(德)을 행함에 힘쓰는데 있다. 나는 오직 후손된 자는 각각 덕을 닦는데 힘써서 선조를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고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내가 나갈 길의 지표로 삼아 물려주신 아름다운 덕을 더욱 빛나게 되기를 바란다.

공의 산소는 고양군의 서쪽 원당면 주교리 박릉곡 계좌의 언덕에 있고 배위는 정경부인 전주이씨 인데 수선(守 善)의 따님이다. 외아들 침(?)을 낳았는데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되고서 호조판서(戶曹判書) 의 증직을 받았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지생(祗生)인데 간성병마사(杆城兵馬使)를 지냈고 지생이 희맹(希孟)을 낳았는데 벼슬이 직장(直長)이다. 희맹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윤공(允恭)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들째 아들은 윤온(允溫장0이다.

  둘째 아들 강생(剛生)은 집현전 부제학을 지내고 의정부찬성에 증직되었으며 강생의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의문(疑問)인데 좌영호군이요, 둘째아들이 절문(切問)인데 정자(正字)의 벼슬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셋째는 심문(審問)인데 정랑(正郞)을 지내고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고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으며 부조전(不?典)의 영예를 받았다.

맏아들인 의문의 아들 종손(宗孫)인데 사용(司勇)이요 둘째인 절문(切問)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대손(大孫)인데 절도사를 지냈고 둘째아들인 중손(仲孫)은 공조(工曹), 이조(吏曹), 형조(刑曹), 예조(禮曹) 등 4조의 판서를 재내고 밀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공효(恭孝)라고 내려주셨으며 또 부조전(不?典)의 영예를 받았다. 셋째인 심문(審問)이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맏이가 원충(元忠)인데 판관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둘째 원공(元恭)과 셋째 원의(元懿)는 사직(司直)을 지냈고, 넷째 원정((元正), 다섯째 원량((元良), 여섯째 원온(元溫)은 모두 진사였으며 일곱째 원준(元俊)은 호군을 지냈다.

  셋째아들 눌생(訥生)인데 참판을 지냈고 눌생이 경신(景信)을 낳았는데 사직을 지냈다. 경신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근손(根孫)이다. 음직으로 봉사(奉事)를 지냈고 둘째인 정손(正孫)은 사직이다.

넷째아들 신생(信生)은 참판을 지내고 찬성에 증직되었다. 신생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호문(好問)은 호조판서를 지내고 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둘째아들인 유뮨(裕問)정랑을 지냈다. 또 호문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철손(哲孫)은 부사이다. 유문은 두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계손(繼孫)인데 군기시정(軍器寺正)이요, 둘째는 인손(仁孫)인데 참군이다.

딸을 셋을 두었는데 큰 사위는 김숙온(金淑溫)인데 생원이고 둘째사위는 윤처성(尹處誠)인데 판사이며 셋째 사위는 유정(柳楨)인데 사승(司丞)이다. 후손들이 너무 번창해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 공께서 돌아가신지 6백여년이나 지나서 공의 모습은 아득하고 공의 빛나던 모습은 이제 뵐 수 없으나 공께서 행하신 바는 바르고, 굳세고, 곧아서 당시에 그 공이 혁혁하여 간사한 자들이 물리치고 정의를 굳게 지킨 것은 백세(百世)토록 본받아야 할 것이며 마땅히 후손들이 잊지 말고 잘 지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묘의(墓儀 묘지 앞에 갖추어야 할 석물 등)에 빠진 것이 있어 후손들이 한으로 생각한지가 오래 되었다.

이 일로 여러 후손들이 뜻을 모아 비석을 세우고 묘도(墓道)를 잘 정돈하고 난 다음 나에게 비명(碑銘)을 쓰라 하였다. 나는 비록 글재주는 없으나 사양하지 않고 보첩에 기록된 것과 고려사에 단편적으로 나온 기록들을 모아 위와 같이 짓고 삼가 선조의 아름다운 덕을 잊지 못하는 작은 정성을 표시한다. 명(銘)한다.

신라기원 2036(1979)년 10월

후손 성균관 관장 성수(性洙)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