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공 휘 증영(訥齋公 諱 增榮) 행록

1. 박증영(朴增榮 1464~1492)

 자는 희인(希仁)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다. 존성재 미(楣)의 아들로 중손의 손자이다. 외조는 강석덕이며 처부는 죽산인(竹山人) 현감(縣監) 박영달(朴英達)이다. 1480년(성종11) 식년 진사시(進士試)에 2등하였고, 1483년(성종14) 3월 춘장시(春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였다. 1486년(성종17) 10월에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있으면서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할 당시의 광경을 본 중국사신 동월(董越)이 기이하게 여겨 내린 표덕서(表德序)에 이르기를, “문장(文章)은 소노천(蘇老泉)과 두보(杜甫)의 것과 같고 글씨는 송설(松雪) 조맹부를 닮았다” 하고 “희인(希仁)”이란 자(字)를 지어 주었다. 성종은 매우 아끼고 경중하여 용연(龍硯)을 내렸다. 149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경연 시독관(試讀官)이 되었다.  홍문관박사와 사간원 헌납을 거쳐 교리(校理)로 별세하였다.

청주 용정동 국계사(菊溪祠). 금산군 부리면 덕산사에서 제향.

 

2. 통훈대부홍문관교리 눌재공 묘비문(通訓大夫弘文館校理 訥齋公 墓碣文)

 공의 휘(諱)는 증영(增榮), 자(字)는 희인(希仁), 호(號)는 눌재(訥齋)이다. 우리박씨 관향은 밀양(密陽)으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고려 때의 선조인 휘(諱) 사경(思敬)이란 분은 판도사(版圖司)의 전서(典書: 정3품 벼슬임)를 지냈다. 판도사 전서가 침(忱)을 나았는데 이분이 호저전서(戶曹典書)를 지냈고 조선조 이태조(李太祖)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을 하사받았다. 호조전서가 강상(剛生)을 낳았는데 이분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 정삼품 벼슬임)을 지냈다. 부제학이 절문(切問)을 나았는데 이분은 찬성(贊成: 의정부 종일품)에 추증(追贈)되었다. 찬성이 중손(仲孫)을 낳았는데 이분이 정난공신(靖亂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품계(品階)는 숭록대부(崇祿大夫)였으며 세조가 공효(恭孝)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공효가 미(楣)을 나았는데 예조참의(禮曹參議)지냈다. 이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다.

공(公)은 갑신년(세조10년 1464)에 출생하였고 정유년(성종8년)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병오년(성종17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도 했다. 중국 사신규봉동월(使臣圭峯董越)이 공의 시문(時文)과 필법(筆法)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하여 공의 자사(字辭)를 지어 주었다.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부친의 상(喪)을 당했는데, 임자년(성종23년 1492년) 1월 28일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상중(喪中)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은 29세였다. 양주마적치(楊洲磨赤峙) 임자원(壬坐原)에 장사지냈다. 부인 공인(恭人: 외명부의 벼슬로 정5품)은 죽산박씨(竹山朴氏)로 현감(縣監)을 지낸 영달(英達)의 따님인데 묘는 청주에 있다.

 아들 둘을 낳았다. 장남은 훈(薰)인데 호는 강수(江叟)이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등과 함께 북문(北門)의 화를 당했는데, 세상에서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일컫는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차남은 혜(蕙)인데 주부(主簿: 종6품 벼술임)를 지냈다. 문도(文度)는 2남 2여를 낳았는데 아들 희원(凞元), 선원(善元)은 모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사위는 이언명(李彦明), 오식(吳軾)이다. 서공원(庶恭元)

희원은 후사(後嗣)가 없었다. 선원은 아들 둘인데 승현(承賢)은 현감을 지냈고 사현(嗣賢)은 판관(判官종 5품 벼슬)을 지냈다.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으로 당대에 명성을 드날렸고 청반직(淸班職: 규장각이나 홍문관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문한(文翰)을 맡았었다. 공이 돌아 가시자 사림(士林)들이 슬퍼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연(經筵)때 성종대왕께서도 하문(下問)하시고 애도를 금치 못했다.

탁영(濯纓) 금일손송(金馹孫送)이 애사(哀辭)를 지으면서 쓴 서문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공은 성품이 단아했고 평소에 과묵했으므로 꼭 말해야 할 때라야만 말했다. 14세 때 부터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의젓하기가 노성(老成)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저명해지기 전에도 모두 공의 덕기(德器)를 인정했다》

 

또 이런 말도 실려 있다.

《희인(希仁)은 상중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이 나서 매우 위독하게 되었을 때도 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채, 상례(喪禮)에 관한 책을 읽었다. 공은 부인(婦人)이 방 밖에서 약 수발을 들었지만 방으로 들여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단정이 일어나 앉아 타호(唾壺: 침뱉는 기구)에다가 침을 뱉고 난 다음 그대로 쓰러졌다. 공의 부인이 방에 들어와 봤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되었다. 아, 희인은 타고난 천품이 그리도 정영(精英 )했는데 어째서 수명을 타고 나지 못했단 말인가? 이제는 그만이구나! 이제 다시는 희인과 이 새상에서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슬픔을 참을 길이 없어 드디어 애사(哀辭)를 지어 슬픔을 달랜다.》

 

애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은 아득하기만 하여 끝이 없는것, 본디 생이란 없는 것이어니 사(死)가 있을리 있겠는가? 800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도 지금까지 길이 살아 있는지는 못했으니 29년을 살고 간 희연과 다를게 뭐있는가? 영겁의 세월로 보면 모두가 하루살이와 다를게 없다네》

우암 송문정공(尤庵 宋文正公: 문정은 송시열의 시호다)이 유고(遺稿)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이세상에 태어난 선비로서 재예(才藝)가 뛰어난 사람은 대개 드믈다. 이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중국의 휼륭한 선비와 글을 주고 받으며 다정하게 즐긴 사람은 더욱 드믈다. 따라서 중국 선비와 칭탄(稱歎)을 받아 명성이 배로 빛난 사람은 드문 가운데서도 더욱 드믈다. 그런데 이제 눌재(訥齋)는 이 드문 것을 모두 아울러 지녔다. 이는 시강동월(侍講董越)이 공에게 지어준 자설(字說)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퇴지(韓退之: 퇴지는 韓愈의 字)의 말에 죽어서 불후의 이름을 남긴다면 누가 요절(夭折)했다 하겠는가?》했다.

이 몇분들의 말에서 찾아본다면 공에 관한 대략을 거의 알 수 있다. 아, 공과 같은 덕행과 문장으로 의당 세상에서 크게 드날려야 하는데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손이 번성하고 이름난 고관대작이 대대로 나왔으니 이는 아마도 공에 대한 하늘의 보시(報施)인가 보다.

난리를 겪은 뒤 마을 사람들이 묘의 비석을 빼갔는데 지금까지 다시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중(宗中)의 장로(長老)들이 함께 의논하여 묘에 비석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해 왔다. 그래서 삼가 가승(家乘: 족보나 문집)에 실려 있는 사적(事跡)가운데 그 줄거리만 발췌하여 기록해서 비석의 뒷면에 새기게 했다

                                                                                                                                                                    14세손 承訓郞 翼來 지음